제1차 세계대전 [第一次世界大戰, First World War]

대전의 개요

1914년부터 18년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처음에는 협상국으로 불림)과 독일·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제국주의적 전쟁.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 제국주의 [帝國主義, imperialism] : 1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 일반적으로는 1870년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독점자본주의(獨占資本主義)에 대응하는 정치적·경제적 구조를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개 이 용어는 침략에 의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팽창주의 또는 식민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특징

제 1 차세계대전의 성격은 우선 개전의 경위가 매우 복잡해 어느 한 나라의 특정행위가 대전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쟁 후 전승국 쪽이 패전국인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전가시켜 독일국민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A. 히틀러의 나치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특징이다. 나폴레옹전쟁을 별개로 하면 19세기 유럽의 전쟁은 어느 것이나 극히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국민의 생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형태로 수행된 내각전쟁(內閣戰爭)이었다. 그러나 제 1 차세계대전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국민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전선(前線)의 병사에 국한되지 않고 후방의 국민까지 전쟁에 동원된 이 세계대전은 국가가 지니고 있는 힘을 모두 동원한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또한 독가스·전차·비행기 등의 신무기가 투입된 것도 이 전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 때문에 전사자의 수도 그 때까지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독일과 러시아가 대략 170만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프랑스가 136만, 오스트리아가 120만, 영국이 90만, 미국은 12만 6000여 명이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는 25개국이었다.

개전 날짜

대전의 특성과 관련해 개전날짜를 언제로 잡느냐의 문제도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략 4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이하 오스트리아로 略記)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일반적으로는 이 날짜를 개전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②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③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④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등이다. ① 의 시점에서는 양국간의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위계승자 F. 페르디난트 부부가 같은 해 6월 28일 세르비아내에 본거지를 두었던 암살자 그룹에 의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사라예보사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계를 무력으로 타도함으로써 대국의 면목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흩어져 있는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대동단결을 꾀하려는 범슬라브주의에 바탕을 두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그 해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결과 독일은 러시아와 전투를 시작하였고 러시아·프랑스동맹에 의해 러시아와 긴밀한 군사적 유대관계를 지녔던 프랑스와도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범한 것을 이유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총동원을 하게 된 것은 전쟁이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고 독일이 참가해 큰 전쟁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판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3국동맹)이 존재했다는 데 기인한다. 원래 이탈리아도 동맹의 일원이었으나 사실상 3국동맹에서 탈퇴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도 처음에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상의 경위를 통해 볼 때 대전 발발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전전(戰前)의 3국동맹과 3국협상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유럽전쟁에서 세계대전으로

대전이 일어난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 유럽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일본이 수행할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한 시점이었다. 미국 참전 직전에 러시아에서 3월 혁명(러시아력 2월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왕조가 무너졌다. 1917년은 대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반에 걸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3월혁명에 이어 11월혁명(러시아력 10월혁명)으로 독일과의 즉시강화를 바랐던 V.I. 레닌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으로 러시아가 독일측에 굴복하였으나 대전 그 자체는 그 해 11월 독일측 패배로 끝났다. 독일측 패전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무제한잠수함작전에 의한 미국의 참전이었다. 결국 유럽전쟁으로 시작된 대전은 세계전으로 전개되었고, 18년 11월 11일 파리 교외의 콩피에뉴숲에서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측과 독일측 사이에 휴전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대전전사(大戰前史)

독일통일의 유산

대전의 원인은 1870∼71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문제로 시작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전후처리방식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국민은 알자스·로렌(엘자스·로트링겐)의 2개 주를 빼앗긴 사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전쟁에서 이긴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 독일통일이 달성되었지만 프랑스국민의 원한은 통일 후 독일과 프랑스 관계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독일제국의 총리가 된 O.E.L. 비스마르크는 위의 2개 주를 합병하는 일에 반대했으나 군사적인 이유로 합병을 주장한 군부에 의해 결국 강행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전을 보장할 국제적 조약망을 만들어내는 데 전력을 쏟았다. 독일통일 달성 후에 그가 먼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간의 3제동맹(三帝同盟, 73년 10월 성립)이었으나 이 동맹도 의지할 만한 것이 못 됨을 보여 준 사태가 75년 발생하였다.

개전의 위기

프랑스 국회가 <카도르(하사관)법>을 성립시켜 육군 증강에 강한 의욕을 나타낸 것을 본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군용말 수출을 금지하는 한편, 신문기사를 이용하여 프랑스측에 압력을 가했다. 75년 4월 9일 《포스트》지(紙)에, <전쟁은 절박한가?>라는 도전적 표제를 단 K.F.H. 뢰슬러의 논문이 실린 것이다. 이 논문에 대하여 독일외무부의 한 고관이 프랑스대사에게 해명했으나, 대사는 그 해명 속에 온당치 못한 표현이 있었던 것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파리에 전했다. 그 내용은 마치 독일이 프랑스의 복수에 선수를 치기 위한 예방전쟁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독일에 직접 경고할 움직임을 보였고, 또한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외무장관 A.M. 고르차코프를 데리고 5월에 베를린으로 찾아가 독일을 적극 견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그 때 예방전쟁을 치를 의도는 없었고, 《포스트》지의 논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은 프랑스를 말로써 위협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 국제적 분위기는 독일이 조심성 없는 태도를 취할 경우 3제동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도와 독일을 협공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1914년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다.

비스마르크체제의 성립과 붕괴

1875년의 사건을 통해 3제동맹이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안전보장체제를 모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비스마르크체제였다. 그 중심은 독일·오스트리아동맹(1897. 10.), 그리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3국동맹(1882. 5.)이었다. 또한 독일과 루마니아동맹도 82년 성립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87년 6월 러시아·독일 재보장조약(再保障條約)이 성립된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발칸문제를 둘러싸고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재보장조약의 내용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에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도 좋은 관계에 있었으므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체제의 완성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독일에 대한 복수전쟁을 원한다 해도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독일의 안전은 충분히 보장된 것처럼 보였지만 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로 사직하였으며, 3월 23일 비스마르크의 후계자인 L. 카프리비총리 등은 오스트리아와의 우호와 확실히 모순되는 러시아·독일재보장조약의 갱신을 거부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으며 94년 1월 4일에는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전제군주국인 러시아가 공화국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리라는 사실을 독일 정치가들은 예상하지 못하였다. 한편 영국은 공업·무역·해군·식민지 4개 분야에서 독일의 도전에 위협을 느끼고 차츰 프랑스·러시아 양국에 접근하였다. 1904년 4월 영국·프랑스협상이 조인되고, 1907년 8월 영국·러시아협상이 조인됨으로써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간의 협력체제가 성립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후계자들이 예견할 수 없었던 외교혁명이었으며, 비스마르크체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독일이 기대할 수 있는 동맹국은 오스트리아 한 나라뿐인 상황이 되었다. 1902년 프랑스와의 비밀 중립조약을 맺은 이탈리아도 확실한 동맹국일 수는 없게 되었고 동아시아 일본도 1902년 영·일동맹, 1907년 불·일 협상과 러·일협상에 의해 독일을 포위하는 협상국측의 일원이 되었다.

발칸문제

러시아는 전통적 정책의 하나인 남하정책에 의거해 발칸반도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세력을 뻗치려 힘쓰고 있었다. 이 지역을 제압하고 있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유럽의 병자>라고 불릴 만큼 약해져 있었고 발칸반도에는 여러 형태의 슬라브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있어서는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1878년의 베를린회의로 이 해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은 일단 꺾였으나, 그 뒤 러시아는 한때 시베리아로부터 만주·한반도 쪽으로의 진출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05)의 패배로 인하여 동아시아 쪽의 진출을 단념한 러시아는 재차 발칸 쪽으로의 남하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그 당시 슬라브민족의 맹주(盟主)인 러시아가 발칸반도의 다양한 슬라브계 여러 민족을 통합해야 한다는 범슬라브주의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이후 일관되게 러시아에 편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쇠퇴를 계속하고 있었던 오스만제국의 현상타파를 목표로 한 청년터키당의 혁명이 1908년에 일어나, 발칸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스니아의 위기

청년터키당의 혁명은 오스트리아에 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양주 합병의 계기가 되었고 양주 합병을 노리고 있었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대해 심한 불만을 나타내며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범슬라브주의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러·일전쟁과 제 1 차혁명(1905)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여서 오스트리아의 배후에 있는 독일과의 전쟁위험을 무릅쓰면서 세르비아를 지원할 수는 없었으며, 1909년 3월 오스트리아의 합병정책을 지지하던 독일총리 B. 뷜로브의 위협적 성명에 사실상 굴복하였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의 조치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일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러시아가 자중함으로써 보스니아 위기는 가까스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고 수습되었다. 그러나 2차례에 걸친 발칸전쟁(1912, 1913) 후 사라예보에서의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페르디난트 암살사건을 계기로 같은 사태가 재차 발생하자 대전은 불가피하게 되어 발칸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이 교차한 1875년의 전쟁절박 위기 때 예견되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전쟁이 발생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은 흔히 <범게르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정책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같은 뜻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은 발칸반도에 사는 독일민족을 오스트리아가 맹주가 되어 통합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대립과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제 1 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배경이 된다.

영국·독일의 대립

인도의 캘커타와 이집트의 카이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을 잇는 지배권을 노린 영국의 3C정책과, 베를린·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바그다드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독일의 3B정책의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1890년대로 집어들어 급성장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우월한 지위를 위협하자 양국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영국·독일의 대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양국의 <건함경쟁(建艦競爭)>에서였다. 독일의 동아시아 순양분함대사령관(巡洋分艦隊司令官)에서 1897년에 해군장관으로 승진한 A. 티르피츠는 1900년에 독일해군의 비약적 발전 강화를 목표로 한 건함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때까지 해군력이 약했던 독일은 이 법안에 실린 건함계획이 실현되면 영국·프랑스 다음가는 세계 제 3 위의 해군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티르피츠의 해군력이론은 제 2 차 건함법안으로 성립되어 독일이 계획대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면 제 1 위인 영국해군과 싸웠을 경우 비록 패하더라도 영국의 해군력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므로 앞으로 더 이상의 영국에 의한 세계 해상지배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티르피츠의 해군증강정책은 영국과 독일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영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체제를 조직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후에 독일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발칸반도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대전의 발발과 경위

사라예보사건과 7월위기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는 아내와 함께 육군 대연습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 3 의 반독립적 국가를 만든다는 그의 구상은 세르비아인 등 남슬라브 여러 민족에 대한 헝가리인(마자르민족) 억압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피억압 민족인 남슬라브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 D. 디미트리예비치대령은 검은손[黑手組]이라는 암살단을 조직,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기 위해 G. 프린치프를 프함한 7명의 자객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 배치하였다. 결국 프린치프가 쏜 권총에 맞아 페르디난트 부부가 죽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A. 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독일총리 T.T.F.A. 베트만 홀베크는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은 계산에 넣고 있었다.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움직임과 그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큰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슐리펜계획과 마른전투

러시아·프랑스동맹이 성립된 결과,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은 러시아·프랑스 양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1906년까지 독일육군참모총장을 지낸 A. 슐리펜은 독일의 동서 양면에서의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슐리펜계획>이다. 이 계획은 독일 육군전체의 7/8 병력을 개전과 동시에 서쪽의 프랑스로 진격시켜 6주 안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러시아군과 맞부딪친다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까지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 전체의 1/8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서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독일군에 대해서는 프랑스방향을 향하여 우익, 즉 북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우선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우익으로 벨기에를 공격하고 북프랑스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3년에 죽었다. 그러나 후임자인 육군참모총장 H.J.L. 몰트케(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H.K.B. 몰트케의 조카로 小몰트케라 불리움)는 우익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는 슐리펜의 계획과는 달리 좌익 쪽으로 많은 병력을 빼돌렸다. 그 결과 남쪽은 강화되었으나 북쪽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개전 직후 북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기 직전 서부전선의 2개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돌렸다. 14년 9월 6∼12일의 마른전투에서 독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이 저지된 까닭은 가장 우익쪽에 있던 제 1 군과 제 2 군 사이에 50㎞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룩셈부르크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육군참모본부에서 몰트케의 대리자로서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R. 헨츄중령이 자신의 판단으로 제 1 군과 제 2 군의 철수를 건의하면서 그 때까지의 진격을 정지시킨 일에 대한 타당성의 여부가 자주 논의되었으나,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몰트케가 슐리펜계획에 2차례나 간섭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고 서부전선의 병력 자체를 약화시킨 데 있었다. 게다가 그 근본에는 독일의 국방예산을 해군증강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육군을 충실하게 육성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티르피츠가 육성한 독일해군은 단 한 차례 영국함대와 싸웠을 뿐이고, 대부분 킬 등의 군항에 머물러 있었다. 잠수함 이외의 함정은 제해권을 쥐고 있었던 영국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결국 18년 10월 28일에 킬항구에서 일어난 해군반란은 독일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헨츄중령의 경고에 놀란 독일 제 2 군은 9월 9일에 서둘러 정찰기를 발진시켜 50㎞에 이르는 간격의 설정을 시찰케 하였고 정찰비행을 통해 영국의 대륙 파견군이 이 사이를 중앙돌파하려는 것을 감지하였다. 위험사태를 간단한 제 1 군과 제 2 군은 헨츄가 진언한 대로 같은 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출은 중앙돌파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전혀 없는 틈을 탄 우연한 진입일 뿐이었다. 원래 영국의 참전구실은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범했다는 것이었고, 슐리펜계획에 의해 벨기에의 중립을 짓밟은 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독일군의 행동이었다. 이처럼 마른 전투에는 뜻밖의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고, 이들 요인은 모두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였으며 마른전투는 대전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결국 슐리펜계획은 영국·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면에서 앞선 협상국측에 유리했고 미국의 협상국측 가담은 사태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 뒤에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마른전투 이상으로 전국(戰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주요 공방전과 과학무기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사투를 되풀이한 북프랑스의 베르됭요새 공방전(1916. 2∼12)에서는 H.P. 페탱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요새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전투에 이어진 같은 북프랑스의 솜전투에서는 프랑스군보다도 영국군이 주력이 되어 독일군과 싸웠고, 3국 군대가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1916. 6∼11). 러시아군은 러시아혁명 바로전 해에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에 최후의 대공격을 펼쳤다. 이 전투는 러시아군을 지휘한 A.A. 브루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브루실로프공세(1916. 6∼9)라 불린다. 이 공세는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함과 동시에 베르됭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는 데 얼마간 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18년 3월 말 대공세를 시작, 한때는 또다시 마른강에 도달함으로써 파리로 육박할 태세를 보였으나(1918. 6) 8월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9월에는 유럽전선에 새로 투입된 미국군도 공세를 취했으므로 독일군은 완전히 패하였다. 과학무기로는 서부전선에서 독가스가 많이 쓰였는데, 독가스를 처음으로 사용한 군대는 독일군으로 벨기에의 이페르전투에서 영국군을 겨냥하여 살포했다(1915. 4.). 전차가 전쟁터에 나타난 것은 솜전투가 한창인 1916년 9월 15일이었다. 그 날 영국군은 그 해 1월부터 시험제작을 했던 전차 18대를 전쟁터로 내보냈고 프랑스군은 17년에, 독일군은 18년에 각기 새로 만든 전차를 전선에 투입하였다. 비행기는 주로 정찰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영국 본토 폭격에서 처음으로 맹활약한 것은 독일의 비행선 체펠린호이었으나 덩치가 커서 영국군의 표적이 되어 이후 비행기로 교체되었다.

비밀외교의 전개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동맹국측에 가담하여 싸웠던 나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뿐이었다. 그러나 1914년 11월에 오스만제국(터키)이 이에 가담하였다. 오스만제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된 것은 다르다넬스해협에 들어와 이 나라에 압력을 가한 독일의 순양전함 괴벤호와 경순양함 브레슬라우호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움직임 이상으로 각국의 주목의 대상이 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본디 3국동맹의 일원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참전의 대가로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이레덴타(Italia irredenta;회수하지 못한 이탈리아)>라고 일컫던 오스트리아령 남(南)티롤(이탈리아인이 많이 살고 있던 땅)을 트리에스테와 함께 돌려 줄 것을 타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당초에는 이런 대가 제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결국 독일에 설득당하였고,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협상국측은 남티롤 등 외에 오스트리아령 달마티아와 아드리아해의 군항 바로나까지도 이탈리아에 참전의 대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15년 4월의 런던밀약에 의해 이탈리아는 협상국측의 조건을 받아들여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해 5월 23일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고, 1년 후인 16년 8월 28일에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이탈리아 총리 A. 살란드라는 국민에게 호소할 때 <이탈리아의 참전은 조국의 신성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상대인 오스트리아군이 약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부이탈리아에서 고전을 계속하였고 17년 7월 말에는 카포렛전투에서 독일군의 도움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불가리아의 참전 경위도 이탈리아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불가리아는 제 2 차발칸전쟁(1913)에 의해 세르비아에게 빼앗긴 마케도니아를 되찾을 것을 바라고 있었으나,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반대로 동맹국 쪽이 마케도니아를 참전의 대가로 줄 것을 약속하였다. 협상국 쪽은 그들 진영에 가담하고 있는 세르비아를 설득할 수 없었다. 15년 9월 불가리아는 동맹국 쪽에 가담하기로 비밀약속을 하고 10월 11일 즉각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16년 8월 27일에는 루마니아가 동맹국을 대상으로 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의 참전을 둘러싼 사정은 불가리아의 경우보다는 이탈리아참전의 경우와 흡사했다. 루마니아는 원래 동맹국 쪽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대전이 일어난 때에는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 동맹국과 협상국 양진영이 제시한 참전대가를 비교·검토한 뒤에 협상국 쪽에 참전하였다. 즉 동맹국 쪽은 러시아가 1898년에 루마니아로부터 빼앗은 베사라비아를 루마니아에 다시 돌려주기로 약속했고, 협상국 쪽은 헝가리령인 트란실바니아와 부코비나를 줄 것을 약속하였다. 루마니아는 러시아의 장군 브루실로프에 의해 1916년 6월에 시작된 브루실로프공세가 당시 큰 성과를 올린 것을 확인하고 협상국 쪽에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불가리아·루마니아를 둘러싼 각국의 임기응변적 술책은 대전 중의 대표적인 비밀외교들이었다. 이러한 비밀외교는 중동에 대해서도 실행되었다. 협상국쪽 내부에서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전후에 분할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콘스탄티노플협정(1913. 3)·사이크스-피코협정(1916. 5.) 등의 비밀조약이 맺어졌다. 사이크스-피코협정이라는 영국·프랑스 두 나라 사이의 비밀협정은 시리아를 프랑스의 세력범위로 정하고, 이라크 남부 등을 영국의 세력범위로 정하는 내용이었다. 한편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아랍인의 협력을 약속 받으려 했던 영국은 메카의 칼리프였던 후세인과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 A.H. 맥마흔간의 비밀 왕복서한(1915. 7.∼1916. 3.)을 통해 아랍인의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지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게다가 영국은 유대인의 전쟁 수행상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밸푸어선언(1917. 11.)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준다는 취지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후세인-맥마흔협정과 양립하지 않고 사이크스-피코협정과도 모순되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혼란은 밸푸어선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요 교전국의 국내형편

마른전투에 의해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되자 양진영의 각 나라는 모두 군수물자와 식량 확보, 국민의 사기앙양과 그 유지책 등과 같은 어려운 과제로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독일의 정세

전쟁 초 독일은 AEG라는 대전기회사(大電機會社) 사장 W. 라테나우가 육군본부 전시자원국 장관에 취임한 뒤 독일경제를 장기전에 맞게 개편하여 군수물자와 식량조달에 큰 성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물자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독일의 정치지도자들은 그 밖에도 갖가지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려 있었다. 대전을 시작하기 전인 1909년부터 17년 7월까지 총리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베트만 홀베크였다. 독일의 헌법체제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통수권이 황제에 소속되어 있었고 문민(文民)인 총리는 작전상의 발언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통수권을 가진 황제가 군수뇌부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나타내 난처한 상황에서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는 무제한잠수함작전을 실행하려는 군수뇌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해군장관 티르피츠를 사임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그 압력에는 굴하게 되었다. 한편, 군수뇌 내부에서도 대립과 알력이 있었다. 몰트케는 1914년 9월에 육군참모총장의 자리를 E. 팔켄하인에게 넘겨주었다. 팔켄하인은 제 8 군사령관 P.B. 힌덴부르크 및 제 8 군참모장 E. 루덴도르프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가운데 어느 전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계속 대립하였다. 16년 8월의 루마니아 참전은 팔켄하인의 사임을 강요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윽고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에 취임하고 루덴도르프는 참모총장에 상당하는 제 1 병참부장에 취임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독일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전쟁반대를 외쳤지만 대전이 일어난 직후인 1914년 8월 4일 50억 마르크스의 군사예산을 둘러싼 국회 심의 때에는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원이 군사예산에 찬성투표를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 국내에서는 일시적이긴 하나 전쟁수행에 협력하고 계급투쟁을 중지한다는 이른바 <성내평화(城內平和)>가 달성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 성내평화에 금이 가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17년 2월 전쟁찬성파와 반대파로 길라져, 반대파는 독립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사회민주당뿐만 아니라 중앙당(中央黨) 등의 정당 가운데서도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그 해 7월이 되자 국회가 <평화를 빨리 실현시키라>는 평화결의안을 가결하였고, 베트만 홀베크는 물러났다. 그러나 그 뒤 1885년부터 4년간 도쿄[東京]의 독일학협회학교(獨逸學協會學校;현재의 獨協大學 및 獨協中·高校)에서 독일어 교사였던 G. 미하엘리스라는 거의 무명의 인물이 총리로 임명되자 힌덴부르크를 정면으로 밀어붙인 루덴도르프의 정치개입이 심해졌다. 이때부터 독일은 실질적으로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체제 밑에 놓이게 되었다. 이 루덴도르프체제는 1918년 10월의 미하엘리스의 후임인 G. 헤르틀링 대신 막스 폰 바덴이 내각을 조직할 때까지 이어졌다. 미국 대통령 T.W. 윌슨에게 평화 중개를 의뢰하기로 결심한 루덴도르프는 윌슨의 요구대로 국내정치를 민주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자유주의자로 평가받던 막스 폰 바덴을 총리의 자리에 앉혔다.

오스트리아의 정세

대전전사(前史)와 <7월위기>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주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전 뒤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구성으로 인한 약점을 모두 드러내어 독일군이 지원하지 않는 전투에서는 연전연패했다. 개전 직후의 오스트리아군과 세르비아군간의 싸움에서도 예상 외로 오스트리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의 갈리치아로 쳐들어갔으나 1915년 5월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해 러시아군을 갈리치아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령 폴란드에서도 쫓아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러시아령 폴란드도 동맹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러시아령 폴란드를 흡수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는 맹우(盟友)인 독일과 격렬히 대립하는 입장을 보였다. 군사력에서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보다 우월한 편이었으나, 다른 민족을 흡수하고 다스릴 능력과 경험면에서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오스트리아 쪽이 유리하였다. 그러나 16년 11월 오스트리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군부는 러시아령 폴란드에 독일 지배하에서의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저항을 하였고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양국은 패전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독일과 알력을 거듭한 오스트리아는 행정능률 저하로 인한 물자부족과 전쟁으로 가속화된 여러 민족의 원심적(遠心的) 경향 때문에 계속 고민하였다. 총리 K. 슈튀르크와 요제프 1세가 죽은 뒤, 뒤를 이은 젊은 황제 카를 1세는 국내의 이러한 실정을 목격하고 독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단독강화를 맺으려는 생각에서 부르봉 파르마집안의 일원인 직스투스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 쪽에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교섭은 실패로 끝났으며 18년 프랑스의 대통령 G.E.B. 클레망소는 이 교섭을 폭로하였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국내에 맹렬히 일어난 염전사상(厭戰思想)을 반영한 것이었다.

영국의 정세

개전시의 영국총리는 H.H. 애스퀴스였으나, 전시중에 군수장관으로서 군수물자 조달에 공훈을 세워 육군장관을 거쳐 애스퀴스의 후임이 된 D. 로이드 조지가 제 1 차세계대전 하의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제 2 차세계대전 때의 영국을 지도한 정치가는 W.L.S. 처칠이지만, 제 1 차세계대전 당시의 처칠은 해군장관으로서 다르다넬스해협 공격작전의 실패로 해군장관직을 사임했다. 1915년 2월부터 3월에 걸친 영국·프랑스함대에 의한 다르다넬스해협 포격과 그 해 4월의 갈리폴리반도 상륙작전은 오스만측의 맹렬한 반격 때문에 영국·프랑스군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개전 직후 육군장관이 된 H.H. 키치너원수는 <영국은 너를 필요로 한다>라는 포스터를 통해서 청년들에게 군대에 나와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키치너는 서부전선과 다르다넬스해협에서의 패배로 결국 책임을 지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의 폭약 부족 책임은 키치너에게 있다는 《데일리 메일》지(紙)의 공격이 15년 봄에 시작되었다. 그 해 5월에는 해군군령부장 J.A. 피셔가 다르다넬스작전에 대해 해군장관 처칠과의 충돌로 사임하였다. 그리고 이 여파는 애스퀴스내각 개편의 동기가 되었다. 이때까지 애스퀴스내각은 자유당의 단독내각이었고, 독일의 이른바 <성내평화>와 같은 형태로 보수당의 협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보수당의 요구에 의해 제 1 차연립내각이 성립되어 보수당에서 8명, 노동당에서 1명의 각료가 입각하였다. 키치너는 가까스로 유임되었으나 해군장관은 처칠에서 밸푸어로 바뀌었다. 그 때까지 재무장관이었던 자유당의 로이드 조지가 군수장관 자리로 옮겨앉은 것은 이 때의 일이다. 16년 6월 러시아로 가던 키치너가 타고 있던 군함의 기뢰 폭발로 죽은 뒤 로이드 조지가 그 뒤를 이어 육군장관이 되었다. 그는 애스퀴스의 전쟁지도방법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고, 그 해 12월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를 얻어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이 내각을 제 2 차 연립내각이라 한다. 그는 뛰어난 연설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국국민의 전쟁에 대한 사기앙양과 유지에 애스퀴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영국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로이드 조지의 공적으로는 이러한 정치적 지도력과 17년 4월 말 독일의 무제한잠수함전투에 대항하는 조치로 구축함에 의한 선박호송(convoy) 계획을 발안, 해군수뇌부의 저항을 누르고 그것을 실행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호송선단제(護送船團制)>에 의해 영국은 독일잠수함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정세

프랑스가 대전에 돌입했을 무렵의 총리는 지난날의 사회주의자 R. 비비아니였다. 그의 내각이 개전 직후에 개편되었을 때 몇 명의 사회주의자가 입각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A. 밀레랑이 육군장관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거국일치의 <신성동맹(神聖同盟)>이라고 불리는 체제었다. 그 뒤 총리는 A. 브리앙, 이어서 A.F.J. 리보로 바뀌었으나 <신성동맹>체제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 체제하에서 프랑스국민은 모진 전쟁을 견뎌내야만 했다. 마른전투가 끝난 뒤에도 북부프랑스의 공업지대는 대전중 가장 격렬한 전쟁터였다. 이는 프랑스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든 사태였다. 16년의 베르됭전투는 북프랑스에서 강행된 전투 중에서도 특히 치열했는데, H.P. 페탱이 지휘한 프랑스군은 가까스로 베르됭요새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17년 4월 무렵 랭스와수아송 방면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 요새시설에 대한 공격에서 특별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의 군부와 정부의 보조가 맞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G.R. 니벨은 육군장관 P. 팽르베와 대립하였다. 5월 니벨은 페탱과 직책 교체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공세의 실패 후 군대의 규율이 해이해져 전선의 프랑스군이 앞으로도 계속 진지를 사수해 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독일쪽은 이런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페탱은 군법회의를 통해 400명 이상에게 사형판결을 내려 군대의 기강쇄신을 꾀했다. 국내에서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17년 9월에는 리보와 교체한 팽르베내각에 대해 사회당이 입각을 거부하여 <신성동맹>은 무너졌고, 11월에는 좌·우익을 포함 277표라는 많은 수에 의해 팽르베내각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이 가결되었다. 그 당시 내각이 차지한 표는 186표에 불과했다. 그래서 R. 푸앵카레 대통령은 클레망소를 총리로 기용하였다. 클레망소는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는 등 거의 독재와 같은 정치형태를 취하였고, 전쟁에 지쳐 있는 조국을 마지막 승리 때까지 굴하지 않고 극복해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리보내각의 내무장관이었던 L.J. 말비와 전 총리였던 J.P.M.A. 카이요 등의 프랑스정계 거물들이 클레망소에 의하여 독일과 내통하고 조국을 배신하는 반역죄를 범했다고 고발될 정도로 이 내각의 반전 평화운동의 탄압은 강력하였다. 또한 프랑스·영국도 대전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클레망소나 로이드 조지에 의한 독재체제가 수립되었다.

미국의 참전

잠수함전을 둘러싼 미국과 독일

미국대통령 윌슨은 제 1 차세계대전 발발 직후, 미국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유지할 것을 밝혀 국민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호가 1915년 5월 독일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을 때 미국 시민 128명이 사망하여 미국과 독일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미국정부는 독일에 엄중히 항의하였다. 그뒤 8월 영국상선 아라빅호가 격침되어 2명의 미국시민이 죽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윌슨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 독일총리 베트만 홀베크는 잠수함작전에 관한 자제를 뜻하는 <아라빅서약>을 9월에 발표했다. 그 뒤 베트만 홀베크는 16년 9월 27일 독일내각의 회의에서 강화조건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9월강령>보다도 훨씬 후퇴한 것으로, 롱위브리에의 일부를 알자스로렌의 일부와 교환하고 벨기에를 재건한다는 것 등의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만 홀베크가 그 해 12월 12일에 동맹국쪽의 강화제안으로서 발표한 것에는 이러한 구체적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12월의 강화제안은 잠수함에 관한 자제를 철폐하는 무제한 잠수함작전 시작을 막으려던 베트만 홀베크의 마지막 노력의 표현이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의 중립을 표어로 내걸어 11월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된 윌슨이 강화문제에서 새로운 제안을 할 것을 예상하고, 베트만 홀베크 쪽에서 선수를 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년 1월 9일 회의에서 베트만 홀베크가 마침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압력에 굴복, 2월 1일을 기하여 무제한잠수함작전의 시작이 결정되었다. 1월 22일 상원에서의 연설에서 <승리 없는 평화>를 제안한 윌슨은 26일 독일에 교전각국의 직접회담을 호소하였다. 베트만 홀베크는 31일 <이 호소는 2∼3일 늦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미 출발하고 말았다>라고 말함으로써 무제한잠수함작전을 통고하는 형태로 윌슨의 호소에 회답하였다. 이에 윌슨은 즉각 독일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미국의 참전과 14개조

독일과 국교를 단절한 뒤 미국은 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이것은 무제한잠수함작전을 강행한 독일군부수뇌들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건이였다. 다만 그들이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미국의 전쟁준비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강력한 장비로 무장한 미국군인들이 영국이 굴복하기 이전에 유럽전선에 도착하는 사태였다. 독일은 그들의 무제한잠수함작전으로 인해 보급이 끊긴 영국이 6개월 이내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로이드 조지가 명령한 <호송선단제>에 의해 봉쇄작전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윽고 투입된 미국 병력과 미국으로부터의 풍부한 군수물자 투입이 유럽전선에서의 독일의 패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미국의 병력과 물자가 전쟁의 국면을 좌우하게 되기 직전인 18년 1월 8일, 윌슨은 상하 양원합동회의 연설에서 강화의 구체적 조건인 <14개조>를 발표하였다. 윌슨은 <14개조>를 통해 공개외교 확립을 요구하며 대전중 횡행한 비밀외교와 정면으로 대결할 자세를 보였고, 또한 전후계획으로써 이제까지 그 예가 없었던 국제연맹이라는 국제기구의 설립을 호소하였다. 그 밖에 <14개조>에는 전쟁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벨기에의 원상회복,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되돌려주는 문제, 폴란드국가의 설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합병·무상금(無償金)의 강화를 목표로 한 것으로 V.I. 레닌의 <평화에 관한 포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혁명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

1916년 브루실로프공세가 중도에 좌절된 뒤 러시아군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린 러시아국민의 반전분위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17년 3월의 <3월혁명>에 의해 로마노프왕조는 붕괴되었고 그 뒤를 이어받은 리보프의 임시정부는 지금까지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연합국측을 안심시켰으나 전쟁 때문에 극도로 지쳐 버린 국민은 실망하였다. 정권은 G.Y. 리보프로부터 A.F. 케렌스키에게로 이어졌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저조하여 11월 7일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1월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레닌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맺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다. 11월 8일에 발표한 <평화에 관한 포고>는 즉각 정전·강화교섭의 시작, 무합병·무상금형태로의 공정하고도 민주적인 강화 실현을 교전중인 각국에 호소하였다. 연합국쪽, 즉 그 때까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영국·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이를 거부했으나, 반대로 러시아의 적이었던 동맹국쪽은 이 호소를 수락할 자세를 보였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독일측 4개국의 강화교섭이 12월 22일부터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측이 12월 말에 제시한 강화조건은 무합병·무상금은 커녕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지역을 러시아로부터 분리시키고 러시아에 거액의 배상부담을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냉혹한 현실정치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내에서 동요가 일어났으나, 일시휴식을 위한 강화가 불가결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레닌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의 대세가 굳어졌으며, 막 탄생한 당시 소련정부는 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측과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러시아와의 조약에 의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강한 압력으로부터 벗어났으나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러시아의 탈퇴로 연합국측에 생겨난 부족분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탈퇴가 독일에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18년 3월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시작했으나 좌절되었고 7월에 영국·프랑스·미국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독일측의 패배는 분명해졌다. 9월 말에 불가리아가, 10월에는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가 항복했다. 독일은 10월 12일 윌슨의 <14개조>를 수락한다는 취지를 미국측에 알렸다. 11월 3일 킬군항에서 폭동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독일혁명이 일어나 혁명의 폭풍 속에서 발헬름 2세는 그달 9일에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막스 폰 바덴 대신 사회민주당의 F. 에베르트정권이 11일에 휴전조약에 조인했다. 이로써 제 1 차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강화회의는 파리에서 19년 1월부터 6월까지 열렸는데, 윌슨도 참석하였다. <14개조>가 회의의 기조(基調)가 될 형세였으나 독일에 대한 보복과 자국의 안전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프랑스총리 클레망소에 의해 이 방침은 크게 바뀌었다. 한편, 영국의 로이드 조지는 클레망소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영국 국민들에게 약속한 독일에 대한 보복공약 때문에 윌슨을 도울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독일에 대한 가혹한 베르사유조약이 만들어지고, 독일 대표단은 파리 교외의 베르사유궁전에 호출되어 일체의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조인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전승국의 일원이었으나 거의 모든 전쟁에서 패하여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런던밀약에서의 참전 대가를 약속대로 모두 차지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국민의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강한 불만은 그 뒤 무솔리니가 파시즘운동을 전개하는 데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탈리아 이상으로 강했던 독일국민의 불만은 그 뒤 29년 이후에 세계공황이 독일을 직접 강타하여 독일경제를 큰 혼란으로 빠뜨렸을 때 한층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히틀러의 베르사유체제 타파 구호에 국민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에 의한 나치즘운동은 세계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히틀러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반도의 옛 독일의 이권 및 남양제도의 획득을 1917년의 밀약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측에 되돌려주어야만 하였다. 이 산둥문제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1919년 5·4운동을 촉발하였다. 전후에 초래된 국제질서에 대해 <가지지 못한 나라>라는 불만을 품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개국은 이윽고 지구상의 자원에 대한 재배분을 요구하고 제 2 차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투르크드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패전국에 종속되있던 민족들에 대하여 민족자결이 인정되어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가 각각 독립했고, 세르비아는 주변의 영토를 얻어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원칙은 영국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투르크의 영토였던 서아시아는 아랍인의 요구가 무시된 채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에 성립된 베르사유체제는 패전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유럽열강의 이해관계 조정에만 주력하여 아시아·아프리카의 약소민족은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전승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결함을 드러내었다.